폴 오스터의 세계를 두고 <우연의 미학>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자주, 흔하게, 우연이 남발되면 자칫 끝에 가서는 이야기의 구조가 와르르 무너진다거나 필연이라는 상대적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 되곤 한다. 그래서 <우연>과 <미학>이라는 두 명사의 조합은 특히 이 양반을 위해 자리를 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거의 다는 아니고 이따금씩). 본문에서 작가의 딸이 부른 듀크 엘링턴의 노래 「스윙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요(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를 들으니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意味がなければスイングはない)』도 생각나고.
조너선 컬러(Jonathan Culler)는 자신의 책 『문학이론(Literary Theory)』에서 이렇게 썼다.
ㅡ 문학적 · 문화적 이론은 서사에 대한 문화적 중심성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논의에 따르면, 우리의 삶을 어딘가로 이끄는 진보로 생각하든, 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든간에, 스토리야말로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주요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ㅡ 서사구조는 도처에 편재한다. 프랭크 커모드는 시계가 <똑-딱>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개의 물리적으로 동일한 소리를 구별하여 <똑>을 시작으로 삼아 <딱>으로 끝냄으로써 시계 소리에다 허구적인 구조를 부여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시계의 똑딱 소리를 가지고 필자는 우리가 흔히 플롯이라고 부르는 것의 모델, 즉 시간에다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키는 조직의 모델로 삼는다.」
이 몇 개의 문장이 내가 말하고 싶거나 느끼고 있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그럼 폴 오스터는 이 <똑>과 <딱> 사이를, 제 생명을 다해 흐물거리는 고무줄로 간신히 지탱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게끔 그 유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걸 거다 ㅡ 전반적으로 간결한 문체와 더불어 고무줄을 잡아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여기서 숫자를 가지고 억지로 끼워 맞춘 재미있는 우연 하나. 『빨간 공책』의 총 면수는 131쪽인데 이 숫자를 각각 더하면 5이고 양쪽의 1과 1만 더하면 2이며 이 둘을 나란히 놓으면 52가 된다. 이 책의 발행일은 2004년 10월 30일인데 이 날은 내가 입대하기 52일 전이며(나는 2004년 12월 21일에 군대에 갔다) 국민학교(습관이 돼서 초등학교라고는 못 하겠군) 때 나는 5학년 2반이었다. 여기까지 끼적였더니 작가는 그의 다른 책 『보이지 않는(invisible)』 52쪽에 이런 말을 써놓았다. <merde(제길)>.
실제로 미치오 슈스케가 의도하고 썼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그러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달과 게』를 가지고 이런저런 확대해석을 한 번 해볼까. 신이치와 하루야가 소라게를 잡는 바닷가라는 공간은 어른들과는 섞일 수 없는 그들만의 고립된 인간관계로 은유되고 또 추상화된다. 그 위에 놓인 페트병으로 만든 통발은 역시 인공적이면서도 굉장히 불안하다 ㅡ 실제로 그들은 그것을 <블랙홀>이라 부른다. 신이치와 하루야 그리고 나루미까지 등장인물은 모두 유동적이고, 불안하고, 어리고, 정상적이지 않고, 세상과는 단절된 곳에 그들만의 집을 만든다. 나루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소라게의 집게발에 자신의 손가락을 내주는 신이치의 행동, 그리고 껍데기에서 나온 소라게를 라이터로 불태우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미끼에 걸려 바동거리는 물고기처럼 상처로써 상처를 만들며 잔혹한 자연의 섭리를 말한다. 그래서 사도마조히즘이 교묘하게 섞인 이 이중성의 일련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떤 발광하는 형상이나 고통스러운 상처를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자연스런 논리에 마주하게 된다. 침묵은 죽음에게 대여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달과 게』에 등장하는 세 아이들은 굴절된 시선과 경쟁, 질투를 수반하며 떠들썩하게 침묵하는 성장통을 겪는 까닭이다.
이적이나 패닉의 노랫말 역시 운문보다는 산문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기에 이 책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초판이 2005년이니까, 그때부터 6년이나 지났네. 이따금 너무 은유에 치중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특이한 이야기 자체가 주는 매력은 유머러스하다. 글과 어울리는 일러스트는 묘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기괴하기도 하고. 그런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건,,,, 책을 좀 소프트커버로 만들어 줬음 하는 거다. 딱딱한 양장은 싫어....
아무 때나 읽을 수 있고, 특히 화장실에 갈 때 편리하다는 게 장점이다. 너무 타켓을 정해놓고 썼다는 느낌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런데 초판 발행일이 2001년이니 벌써 10년이 다 된 책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엔 이런 책을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국내작가들의 작품을 챙겨보지 않은 것도 좀 미안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나는 두 무라카미(하루키와 류) 씨들에게 심취해 있어서 좀 더 폭넓게 눈을 둘 여유가 없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본 특유의 순수소설이 지겨워져 그때부터 다시 국내 작품들을 읽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커다란 조화의 물결 속에서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게나. 끝내야 할 곳에서 끝내버리고 다시는 혼자 깊이 생각 마시게. ㅡ 도연명
ㅡ 철학가의 철학은 너무 고매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난 그리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들의 철학은 나 같은 범인들에게는 그 가장자리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든든히 먹은 다음에 노래방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른 후, 또는 골프장에서 후련한 샷을 날린 후, 자신에게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설마 삶이 멋대로 즐기기 위해 있겠는가? 아니면 사람이 설마 추위와 굶주림을 참기 위해 태어났겠는가? ㅡ 프롤로그 中
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에서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 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 공포 소설 『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 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거다(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책을 읽는 과정은 ㅡ 두 번쯤 읽으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ㅡ 쉽게 삼킬 수 있게 만들어진 캡슐 속의 약이 아니라 겉의 캡슐이 부서져 바닥에 모조리 쏟아버린 듯한 기분이다. 가정 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대저택의 주인이라는 작자는 단 한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에 소년은 제 가정 교사에게 「이 악질아!」 하고 소리친다. 가정 교사가 헛것을 봤거나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하고 그냥 넘겼으면 좋겠다. 단순하다면 한없이 깔끔하지만, 복잡하다고 보면 아주 훌륭하게 공포란 장르에서 가치 있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사의 회전』에서는 작가의 지적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유령>만이 존재한다.
『상상력 사전』은 순도 백퍼센트 화장실 책이다(헐리우드의 화장실 유머 말고). 화장실은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을 해결하게 해주는 지상 최대의 은밀하고도 순결한 곳이다(解憂所) ㅡ 8차선 도로 한복판에서도 당당히 엉덩이를 까고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틀린 말이 되겠지만.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정갈한 곳에서 읽기 제격인 책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베르베르는 이 책 「반대로 하기」꼭지에서 <때로는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과 반대가 되는 것을 해보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며 자고 싶을 때 깨어 있어 본다든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정적 속에 그대로 있어 본다든지, 자동차를 타고 싶을 때 걸어간다든지 하는 예시를 들고 있지만, 나는 그냥 화장실에 눌러 앉아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하이쿠俳句(일본 고유의 짧은 정형시) 중 이런 게 있다.
***「時鳥厠半ばに出たかねたり」.
해석하자면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이다. 이걸 나에게 적용시켜보면 이렇게 된다. <급하다고 밖에서 부르지만 『상상력 사전』 읽느라 나갈 수가 없다.>
*** 이 하이쿠는 숨은 의미가 있다. 소세키가 어느 정치인(이름은 잊어버렸다)의 초대를 받았는데 그를 뻐꾸기에 비유하여 자신은 지금 소설 집필중이라 갈 수가 없다는 내용의 하이쿠를 지어 답장을 보낸 것이다.
웃고 나면 혁명은 대체 언제 한단 말인가. 지붕에 올라간 미친놈(「지붕 위에 미친놈이 있다」)이나 전화통만 붙잡는 양반들(「모든 것은 주지사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그나 코미디나 풍자는 언제나 서민들을 웃게 함으로써 그 역할을 한다. 언제나 끊이지 않는(그럴 수 없는) 담론들은 청맹과니나 무지렁이 같은 국민들을 위해 ㅡ 때로는 그들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ㅡ 존재한다. 더구나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은 통지역성과 통시대성을 갖고 있어 <혁명을 하더라도 일단 웃고 난 후>라는 유효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장편(掌篇)들이다. 아니, 할 말이 없다. 말을 할 수 없다.
흡연실을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나는 정기권을 찍고 오십 미터쯤을 걸어가 선로 앞에 선다. 츄오센(中央線)은 쾌속이 많아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칸다(神田), 오차노미즈(御茶ノ水), 요쓰야(四ツ谷)만 거치면 바로 신주쿠(新宿)다. 노란선 안쪽으로 펑퍼짐한 카고 바지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나는 설마, 하며 그의 바지 속에 구겨 넣은 오른손을 주목한다. 그 속에는 아마도 권총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몇 발이 장전돼있는지 꼼지락거리며 세고 있는 중이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전철이 들어와 서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젠장! 이렇게도 무료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입 속에 조그만 탄환 하나를 박아 넣을 것이다. 무심코 돌아본 자동판매기에 드링크를 손에 쥔 남자가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리포비탄D다. 이걸 마시면 비타민 A인지 B때문에 항상 오줌이 노랗게 나온다. 갑자기 아랍인 하나가 그의 얼굴을 엉덩이로 막으며 리포비탄D를 뽑는다. 저 자는 가뜩이나 얼굴이 누런데다가 치아까지 변색되어 있다. 아마도 저걸 많이 마셔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웅성대고 벨이 울리고 차량보다 바람이 먼저 내 앞을 지나간다. 칼 같은 전철 시간 때문인지 한꺼번에 올라탄 사람들로 내부는 금세 더워진다. 문이 닫히자마자 중년의 남성이 토악질을 해댄다. 이쪽에서는 까치발을 해야만 보인다. 그가 위를 깨끗이 비울 때까지, 마지막에 약간의 얼굴 경련을 겪을 때까지, 스스로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쏟아져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치울 때까지 사람들은 쳐다만 보고 있다(한국이었어도 그랬을까?). 그러나 그의 손수건은 너무 얇고 작아서 그것들을 다 처리하지는 못한다. 순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
한 개의 거울이 매일매일 똑같은 절망적인 모습만 비춰 준다면, 평행으로 놓인 두 개의 거울은 밀도 높고 순수한 그물망 같은 상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사람의 시선을 세상의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무한궤도, 그 우주 공간의 순수성 속으로 끌고 간다.
ㅡ 본문 p.180
아마도 이런 글쓰기였을 것이다. 주인공 <나>는, 자기만의 투쟁 영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확장시키지는 못한다(위의 글은 내가 쓴 허구의 이야기다). 역자는 영화 『생활의 발견』을 언급하지만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은 선배가 좋아하는 여자와 놀아나고 유부녀를 만나 참을 수 없을만큼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 여인에게 같이 죽지 않겠냐며 진지하게 묻는다. 그는 <사람에게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라>며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는 선배의 말을 영화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며 자신의 투쟁 영역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우엘벡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확장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투쟁 영역의 확장』은 위에 내가 쓴 상상 속의 이야기에서처럼, 시간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고 삶에의 욕망 자체도 없다. 결국 소설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이면서 비관을 향해 달려가는 <확장되지 못할 한없는 투쟁>이다.
오스터를 읽고 무얼 말해야 할까. 무엇이 보이는 것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펄떡거렸고 무엇이 잠자코 있었을까. 전반에 걸쳐 투영되었을 많은 역사의 기록들과, 그 기록들이 만든 전쟁들과, 그 세대들을 일컫던 신조어들은 차치하고, 누가 총을 들이대고 쏠 거라고 하면,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우리가 장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총은 장전된 것이다(p.194-195). 어 떠한 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틀즈의 《Abbey Road》 앨범에 등장하는 런던의 세인트 존스 우드 근처의 횡단보도와, 거기서 분명 살아 있었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갖고 있었을 어떤 이름모를 벌레의 행로가 상상됐다. 보이지 않는 건, 역시나 보이지 않는 거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해 놓고 무명의 다수와 둘러앉아서, 보이지 않는 걸 본 자에게 그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혼자만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거나.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것은 다시, 종국에는,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게 된다. 그것을 본 자 빼고는.